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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여자아이와 동물원의 하룻밤 -1장. 그 날 아침의 기억.

만월(彎月)의 밤.
그 보름달의 붉은 기운은 생명체를 가진 모든 것들을 미치게 한다.


보름달의 빛이 너무나 붉었던 만월(彎月)의 밤이었다.
그 달빛 아래서 여자아이는 쫓기고 있었다.
"하악.. 하아.. 하아..."
여자아이는 공포에 질려서 이 낮선 공간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자아이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은 어떤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었다.
'아... 어떻게 된 거지..? 이 이게..?'
16살의 이 여자아이는 지금 자신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한 밤의 동물원, 넓은 동물우리 안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젠 뒤에서 쫓기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아이가 도망쳐 나온 곳은 다름 아닌 그 짐승들이 가득 무리를 지어 야성의 밤을 보내고 있는 공간이었다.
칵 칵.. 컹 컹컹...
짐승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붉은 만월의 밤.
그 보름달 아래에서 발정에 가득 찬 짐승들이 야성의 본능을 갈구하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놀라 그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자신을 뒤쫓던 짐승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아 아..."
여자아이는 눈앞의 광경에 넋이 나가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야생의 울음소리들.
여자아이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야성의 흥분과 울림.
심장 가득히 전해져오는 알 수 없는 고동소리, 그리고 전율.
오늘밤, 붉은 만월 아래에서의 그들은 이미 동물원에서 인간들에 길들여지던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저 야성의 본능을 갈구하는 짐승들이었다.
그리고 어찌할 줄 모르고 떨고 있는 이 여자아이의 주위를 뒤쫓던 짐승의 무리들이 어느새 둘러싸고 있었다.
크르르.. 크르릉..
그 짐승들은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사나운 얼굴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을 했다.
여자아이는 이 짐승들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서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자아이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짐승들이 단단하게 세워서 위협을 하듯 들이밀고 있는 그 놈들의 길다랗고 시뻘건 자지들이었다.
"꺄 악..."
여자아이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아.. 아흑.. 사 살려주세요.. 흐흐흑.. 누구 없어요..? 제발..."
가련한 여자아이는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지만, 그 목소리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파묻혀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못했다.
이미 숙직중인 사육사들도 잠이 든 깊은 밤이었던 것이다.
그 때,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있던 짐승의 무리들이 갈라지며, 커다란 검은 물체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저 위에서 암컷들을 유린하고 있던 그들의 우두머리 수컷이었다.
덩치도 다른 짐승들에 비해 훨씬 크고 사나운 그놈은 낮선 침입자 때문에 자신의 교미가 방해를 당하자 경계심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아 아.. 흐흐 흑..."
여자아이는 덩치가 송아지 만한 개처럼 큰 이 사나운 짐승에 더욱 겁을 먹고 울먹이면서 오돌오돌 떨었다.
크르르...
그 놈은 이 낮선 침입자에 대해 날카로운 송곳니로 적의를 드러내면서 잠시 경계를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이 우두머리 수컷이 다가오자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만 돌부리에 걸려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아이가 당황하여 허둥대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만 오금이 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자신의 얼굴 앞으로 그 짐승의 사나운 얼굴이 긴 주둥이를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아이의 작은 몸에 비해 우두머리 수컷의 덩치가 훨씬 커 보였다.
'어.. 엄마야...'
여자아이는 엉금엉금 기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지만 이제 여기서 죽었구나 싶었다.
"흑.. 흐흑..."
그리고 눈앞의 짐승이 자신을 향해 앞발을 치켜들었을 때,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작은 몸을 웅크렸다.
"꺄악...!"

그리고 잠시 후..
그 짐승의 우두머리 수컷은 손으로 여자아이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어디론지 끌고 가고 있었다.
"아악.. 아흐흑.. 아 아파.."
우두머리 수컷의 힘은 엄청나게 세었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반항을 하면 이 짐승에게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심과 당장 엄습하는 아픔 때문에,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며 이 짐승에게 끌려갔다.
주변의 다른 수컷들은 우두머리가 낮선 침입자를 공격하자 큰 소리들을 내며 흥분했다.
여자아이는 공포에 질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작은 심장이 지금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고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아 아흑..."
'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
지금 이 짐승에게 끌려가면서도 여자아이는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발 이것이 꿈이기를 바랬다.
그저 악몽이었을 뿐이기를 바랬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아냐.. 오늘은 시작부터 이상했어...'
'처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어쩌면 그랬다.
그 날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날은 여고 1년생인 지윤이의 봄 소풍 겸 사생대회 날이었다.
하지만 집을 나서는 지윤이의 마음은 밝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날보다도 기분이 울적하고 엉망이었다.
"지윤아.. 지윤아..."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지만 지윤이는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침부터 엄마와 크게 싸우고 나오는 길이었다.
엄마와는 이미 며칠 전부터 냉전 중이었다.
"정말이지.. 기집애 성질머리 하고는.. 지 아빠를 닮아서.. 그래 마음대로 해라.. 못된 기집애.."
쾅..
지윤이의 엄마는 아직 분이 삭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이 서운해서인지, 약간 눈물마저 글썽이며 아파트 현관문을 세게 닫았다.

지윤이의 부모님들은 2년 전에 이혼을 했었다.
별거 이유는 남편의 실직으로 인한 가정 불화였는데, 그녀가 먼저 별거를 요구했고 이혼을 원했다.
남편은 아이를 생각해서 반대를 했지만, 결국 아내와 다시 합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외동딸이던 지윤이의 양육권 문제 때문에 이혼이 늦어졌는데, 당시 변변한 직장을 다시 얻지 못하던 남편 대신에 경제력이 있던 그녀에게 양육권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일은 당연히 어린 지윤이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아빠와 친했던 지윤이는 그 일로 인해 엄마와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전에는 화목한 가정이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집들보다 부부간의 사소한 트러블이 많았고, 초등학교에 올라온 이후로는 가족 간의 즐거웠던 기억이 지윤이에게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의 이 여자아이는 그런 대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나마 세상에서 가족이란 울타리로 이렇게 안주해있을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세상과 별로 친하지 못했던 이 사춘기 소녀에게 남아있던 그 울타리는 엄마의 이기심으로 인해 깨어졌다.

엄마의 이기심..!
여자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 나름대로의 입장과 사정이 있다고 하지만, 지윤이가 보기에는 그저 이기심에 불과했다.
지윤이의 엄마는 그 이후로 딸이 삐뚤어 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엄마에게 대들 줄도 몰랐던 소심한 아이가 이렇게 된 탓을 그녀는 전남편에게로 돌렸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부모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아이가 안쓰러워 들이는 세심한 정성이 번번이 거부를 당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알 수 없는 분노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딸의 마음을 잃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그 책임을 모두 전남편에게 돌리고 말았다.

이런 그녀의 분노와 불화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 약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딸아이가 사전에 이야기도 없이 하교 길에 인천에 있는 전남편 집으로 찾아간 것이다.
그것도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결국 지윤이가 학교를 빼먹은 것을 안 그녀가 직접 인천까지 찾아가 아이를 끌고 와야 했다.
물론 지윤이는 이것이 자기 마음대로 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전남편이 아이를 뺐어가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여기고 그와 대판 싸움을 벌였다.
여기에는 그 동안 누적된 그녀의 피해의식도 상당히 작용을 했다.
최근 전남편은 복직을 하고 형편이 많이 나아진 데다, 새 여자까지 생겨 재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윤이는 그 여자와도 함께 지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녀의 의심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전남편과 그 여자는 지은 죄도 없이 그녀의 행패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일들을 겪은 후, 지윤이의 마음은 엄마에게서 완전히 떠나고 말았다.
'어디로든지 떠나버리고 싶어..'
여자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침에 또 다시 엄마와 크게 싸운 뒤, 바로 약간의 짐을 싸 가지고 집을 나와버리고 말았다.
배낭에서 사생대회에 가져가려 했던 도시락과 미술도구 준비물들을 모두 꺼내고, 대신 옷가지와 일부 필수품들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뛰쳐나와 버린 것이다.

"후 우..."
지하철역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지윤이의 입에서 길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엄마가 만약 자기 방에 들어갔다면 아마 지금쯤 자기가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하지..?"
이렇게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지난번처럼 인천의 아빠 집으로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집도 솔직히 오랫동안 가 있기에는 머뭇거려지는 곳이었다.
비록 아빠가 반겨주고 아빠의 새 여자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새 가정에 자신이 끼여들기는 싫었다.
지윤이는 지하철 역 매표소 앞에 서서도 한참을 우두커니 고민을 해야 했다.
'어차피 인천에 가도 출근하고 집에 안 계실 텐데.. ........ 일단 그냥 사생대회에 갈까..?'
하지만 이미 사생대회 준비물은 집에 놔두고 나와버린 후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도 별 소용이 없잖아.. '
'............'
'지금 그냥.. 아빠에게 갈까..?'
'가서 안 계시면.. 전화라도 하지 뭐.. '
지윤이는 괜히 여기저기 방황하느니 그게 낮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빠의 얼굴이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지금.. 보고싶어.. '
그래서 지윤이는 아빠의 집으로 가는 주안행 전철표를 끊었다.
그리고는 작은 한숨을 쉬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역 개찰구로 향했다.

지윤이 엄마는 출근하려다가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딸아이가 자신과 싸운 뒤 아침도 안 먹고 뛰쳐나갈 때는 자신도 화가 나서 별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딸아이의 방문을 열었다.
평소에는 열쇠로 잠가 놓던 방문이 열려있었다.
"응..?"
그리고 책상 위에 미술도구들과 화판이 그대로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사생대회 하는 것.. 아니었나..?"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선을 돌리던 그녀에게 침대 위에 던져진 도시락이 나타났다.
".......!"
지윤이 엄마는 곧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딸아이 옷장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녀는 곧 알 수 있었다.
"아.. 아니..! 이.. 기집애가..."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느라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갑자기 문을 쾅 닫으며 딸아이의 방을 나와 버렸다.
"나쁜 기집애..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집 나가서 지 아빠하고.. 그래.. 찾지 않을 테니.. 둘이서 잘 살아봐..."
"내 이럴 줄 알았어... 그 나쁜 자식.. 결국 아이를 꾀어내고... "
울분을 참지 못하는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지윤이는 지하철을 타기에 앞서 몇 번이나 망설이며 열차를 4대나 놓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벌써 한 달이라는 시일이 흘렀지만, 아직도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의 비좁은 사람들 틈에 갇히면 그 날의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그 일이 있고 나서 인천으로 도망쳐 버린 후에, 지윤이는 다음 날 아침에도 서울로 돌아올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밤새 혼란스런 밤을 보냈던 지윤이는 차마 그 혼잡한 지하철을 다시 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출근길의 아빠에게도 무리하게 데려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캐물으시면 전날 저녁의 일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걱정 끼쳐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무 도움도 청할 수 없었고, 아빠는 지윤이가 학교에 빠진 사실을 엄마로부터 받은 전화를 통해서야 알게 되셨다.
화가 나서 인천으로 쫓아온 엄마와 놀라서 집으로 온 아빠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아빠의 새 여자가 한자리에서 마주친 것이 그 날 점심 때였고, 그 순간은 지금도 지윤이가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었다.
이미 지난밤에 지윤이의 일로 전화한 아빠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엄마는 이번에는 아빠의 새 여자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소리들을 쏟아내었다.

그때 지윤이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어디론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 후에도 지윤이는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을 탈수가 없었다.
대신 버스를 타보았지만 갑갑한 사람들 틈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매 한가지였다.
그래서 지윤이는 지난 한 달 동안 평소보다 몇 십분 일찍 집을 나서 지하철 네 정거장 거리의 학교를 걸어서 통학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시 이 시간대의 지하철을 타야 했다.
그래야만 지금 보고싶은 아빠가 계시는 인천으로 갈 수 있었다.
지윤이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지하철의 승객들이 좀 적어졌다 느꼈을 때, 열차에 들어섰다.
'이젠.. 좀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지하철이 잠실역을 지나면서 노선을 바꿔 타는 승객들이 들이닥쳤을 때, 지윤이는 다시 꽉 찬 사람들 속에 갇혀야 했다.
'아...!'
그리고 점차 그들의 체취 속에서 다시 답답함을 느끼며 숨이 가빠져오기 시작했다.
지윤이는 자신의 몸에서 서서히 알 수 없는 미열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하아.. 차 참아야.. 하는 데... '

어느새 지윤이의 의식은 조금씩 혼미해지며 그 날의 기억이 그녀의 몸을 통하여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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