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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여자아이와 동물원의 하룻밤 -6장. 만월의 밤에 눈을 뜨다.

지하철은 여전히 덜컹거리고 있었다.
지하철의 전등은 모두 꺼져있었고,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들만이 어두컴컴한 지하철의 실내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지윤이의 주위는 큰 키의 남자들에 의해 비좁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지윤이는 숨이 막힐 것 같아 무어라 소리쳤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그 사내가 다시 지윤이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은밀히..그리고 깊숙하게..사내의 거친 손이 지윤이의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와 여린 속살들을 탐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이제는.. 시 싫어...'
지윤이는 마음 같아서 당장 그의 손은 뿌리치고 싶어했으나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여전히 입은 트이지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모르는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 아윽... '
사내의 손은 점점 자신의 손놀림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여자아이의 몸을 알아챘는지, 더욱 대담하게 지윤이의 깊은 몸 속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아으.. 하아.. 아으응...'
지윤이는 점차 젖어오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고개를 힘껏 도리질했다.
'아냐.. 아냐.. 싫어...! '

"헉...!"
잠이 깬 지윤이는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몸이나 마음이나 모두 힘들어서였을까?
그 사이 잠이 들었었던 것 같았다.
"......!"
잠시 몽롱해있던 지윤이는 방금 전까지 꾸었던 꿈이 생각나자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꿈은 그 날 이후 밤마다 자주 꾸는 꿈이었다.
그리고 밑에서 약간 축축한 기운을 느껴졌다.
"아...!"
지윤이의 다리 사이는 이미 흠뻑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늘 그 꿈을 꾸고 나면 지윤이의 몸은 항상 흥건히 젖어들고는 했다.
".........."
그리고 매번 스스로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싫어.. 정말.. 이런 거..."
여자아이는 혼잣말로 되뇌었다.
"................"
그렇게 잠시 참담한 기분으로, 한편으론 아직 몽롱한 상태에서 주저앉아 있던 지윤이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그런데... 여기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리고 잠들었다 깨어서 그런지,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바닥은 차가운 콘크리트에 종이상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전체적으로 약간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어떻게 된 거야..?"
지윤이는 이런 상황에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부스럭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
그러나 곧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마나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발에 경련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겨우 더듬더듬 벽이 짚고 자리에서 일어선 지윤이는 아직 겁에 질린 채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이게.. 어떻게..? 그..러니까..."
지윤이는 차근차근 이전의 기억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낮에 자신은 미애네 패거리를 피해서 어느 건물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그리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 여기가 거기인데..."
이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울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구나..! 후우... 근데..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지윤이는 시계를 보려고 했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깜깜하지..? 밖에서 불을 껐나..?"
지윤이는 왠지 불안해졌다.
그래서 혹시 전등 스위치가 있을까하여 벽을 더듬거려 보았다.
그러다가 손에 문고리가 잡혔다.
"아..! 문이다.."
지윤이는 기쁜 마음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밖도 여전히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는 왠지 속으로 불안하면서도 자기가 있던 창고의 불만 꺼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복도 역시 불이 꺼진 것을 알게되자, 그 어렴풋한 불안이 현실로 다가왔다.
"호 혹시..."
설마 동물원이 벌써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 직원들이 퇴근을 한 것일까?
문득 그런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아 아냐.. 내가 얼마나 잤다고..? 깜박 잠이 든 것뿐일 거야...'
그러나 조심스럽게 더듬어 걸어간 지윤이의 눈앞에 저 높이 작은 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창으로는 달빛이 작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 안돼.. "
지윤이는 놀라서 그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 30분..
이미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맙소사..! 내..내가 얼마나 잠들었던 거야..?"
지윤이는 자신이 10시간이나 넘게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몹시 당황했다.
이미 자기 학교 학생들이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동물원이 폐장한지도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직원들이나 사육사들도 퇴근하고 없을 것이다.
"아..."
자신이 이곳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지윤이는 당황하여 출구를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지윤이는 겨우 겨우 낮의 기억을 가지고 어둠 속을 더듬어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안 돼.. 이러면.."
지윤이는 문을 쾅쾅 두드리기도 하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어떡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지금 이 건물에 직원들은 하나도 없는 걸까..? 그래도 숙직하는 분은 계시지 않을까..?'
'그래.. 동물원인데.. 밤에 동물들 돌보시는 분이 계실지 몰라..'
지윤이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 여기에.. 사람이 갇혔어요..."
탕 탕..
나중에 직원들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좀 막막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30분을 소리쳤을까?
야속하게도 저 문의 바깥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오늘은 숙직하는 직원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숙직하는 직원이 잠에 너무 골아 떨어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직원들의 숙소가 다른 건물에 있어 너무 먼 것인지?
지윤이는 알 수 없었지만, 끝내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이제는 지윤이의 목까지 약간 쉬어가기 시작했다.
"흐 흐흑.. 어 어떡해... "
지윤이는 이윽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왜 오늘은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 거야...'
그렇게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조용히 울먹이고 있을 때였다.
지윤이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지윤이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여운을 전해주는 소리들이었다.
'동물원에서 키우는 동물들 울음소리인가..?'
지윤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그 소리가 궁금하여 유심히 들어보고 난 후였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 소리가 지윤이가 있는 곳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는 것이었다.
"혹시..?"
지윤이는 그 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다른 출구를 통해 들려오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발.. 그랬으면...'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닐 거야.. 동물들은 밤에 안에서 재운다고 들었거든...;
지윤이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소리들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들은 지윤이가 들어온 쪽에서 나고 있었다.
아직 겁에 질린 채 어둠 속을 더듬어 가는 지윤이의 앞에 새로운 통로가 나타나고, 이윽고 또 다른 철문이 나타났다.
"아... 여기서 끝인가..?'
지윤이는 다시 철문에 가로막히자 적지 않게 실망을 했다.
그러나 그 철문 너머에서 들리는 그 묘한 울림의 소리들은 끝내 지윤이를 유혹하고 말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윤이는 그 철문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생각과는 달리 잠겨있지 않았다.
"어머...!"
문이 잠기지 않은 것을 알자 지윤이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나갈 수 있나 봐...!'
그렇게 생각하며 지윤이는 무거운 철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순간 갑작스레 커진 그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 안쪽과는 다른 새로운 공기가 훅 지윤이의 얼굴을 덮쳤다.
그것은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동물들의 냄새를 품고있는 공기였다.
그리고 열린 그 철문 너머에는...

문안으로 들어선 지윤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정경에 놀라 넋이 나가 있었다.
그래서 뒤로 자신이 들어온 철문이 쾅하고 닫혀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곳은 지윤이가 원하던 바깥이 아닌 또 다른 실내 공간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윤이는 미처 실망한 겨를이 없었다.
저편 멀리에 보이는 높은 콘크리트 벽들과 철골 구조물, 그리고 유리벽들이 이 넓은 공간을 사방으로 둘러싼 것이 분명했다.
더운 공기가 가득한 이 넓은 공간 안은 마치 커다란 식물원인 것처럼 처음 보는 나무와 식물들이 주변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널찍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높은 바위들과 나무들이 다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밤하늘에서 유리 천장 안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보름달에 의해 신비스럽고 황홀하도록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붉은 기운마저 느껴지는 신비스런 달빛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지윤이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녀를 이곳까지 이끌려오게 한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들이었다.
저 멀리 평지와 바위들 위에서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서로 어울려 내는 그 울음소리들은 지윤이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야성의 흥분과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 소리들의 묘한 울림은 바로 지윤이의 가슴속으로 전해져 왔고, 지윤이는 그 울림에서 다시 왠지 모르는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일까? 이것은..
여자아이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 짐승들이 내는 야성의 울림에 취한 듯 조금씩 나무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때마다 지윤이는 왠지 그 울림에 맞추어 자신의 심장도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이 그 짐승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까지 걸어나왔을 때, 지윤이는 순간 숨을 멈추어야 했다.

"헉...!"
지금 지윤이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야성의 흥분과 열기가 가득 찬 그런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검은 짐승들 십여 마리가 집단으로 교미를 하고 있었다.
지윤이는 순간 얼이 빠진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아... 세상에... '
지윤이는 이 어두운 야성의 공간에서 달빛 아래 드러나 있는 이 짐승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암컷으로 보이는 짐승들이 힘겹게 엎으려있고, 그 위로 암컷의 두 배나 되어 보이는 커다란 수컷들이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저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으며 흥분된 야성의 몸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십여 마리의 수컷과 암컷들이 섞여서 내는 집단의 교성.. 울음소리.. 짖어대는 소리..
이것이 지금 이곳까지 지윤이를 이끌어오게 한 그 울림의 정체였다.
두근 두근..
지윤이의 심장이 점점 크게 뛰고 있었다.
자신의 귓전으로 파고드는 이 짐승들의 교미하는 소리와 야성의 울림에 여자아이는 정신이 멍해지고 있었다.
지윤이는 그야말로 뭐에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집단으로 벌어지는 그 격렬하고 흥분된 교미들.
귓전으로 흘러 들어와 가슴을 내리치는 야성의 소리.. 그 감각.
어느새 지윤이의 몸 속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그 열기는 점차 지윤이의 호흡을 가쁘게 만들어가고 있었고, 여자아이의 몸에서 스스로 잊고 싶어하던 또 다른 몸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
지윤이는 자신의 몸에서 느끼는 이런 반응에 당황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윤이도 이런 자신의 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흥분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져 오고..
그리고 몸에 서서히 미열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느새 온몸의 감각이 노곤해지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 하..."
여자아이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달뜬 숨결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윤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이 열기로 가득 찬 공간 안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보름달의 달빛..저 붉은 기운마저 느껴지는 보름달의 달빛..그리고 그 달빛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기운..저 보름달의 달빛이 여자아이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인지?
지윤이의 몸을 휘감아오는 저 달빛과 짐승들이 내는 야성의 울림은 어느새 기억 속의 사내의 손길로 변하여 여자아이의 몸에서 그 날의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아.. 내가 미쳤나봐..?"
지윤이의 몸은 어느새 다시 젖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여자아이는 보름달의 알 수 없는 기운에 취한 듯 몽롱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 보름달 때문이야..."

이미 여자아이는 이곳에 갇혀버린 자신의 처지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지윤의 귓가에 갑자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몇 마리의 수컷이 지윤이를 보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들에 인광이 번득이는 것이 섬뜩했다.
그 때문에 지윤이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두려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물우리 안으로 마치 침입자의 존재를 경고하는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계속 되더니, 몇 마리의 수컷들이 지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마치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짐승들에 놀란 지윤이는 그제서야 허겁지겁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지윤이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내어서 자신이 들어온 문 쪽으로 도망을 쳤지만, 그 문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닫혀있었다.
"아... 왜 안 열리지..?"
황급했던 지윤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안으로 열리는 문을 밖으로 밀며 허둥대었다.
그때였다.
뒤쫓아오던 수컷 한 마리가 그대로 문 쪽으로 뛰어들어 몸을 부딪쳤다.
콰앙..
"꺄악...!"
순간 지윤이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문에서 물러섰고, 어느새 출구 앞에는 수컷 한 마리가 크르릉거리며 가로막고 서있게 되었다.
경황이 없고 아직 어두워서 검은 짐승의 모습은 확실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송곳니만큼은 달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아.. 어떡해.."
지윤이는 다른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악.. 하아.. 하아..."
그러자 수컷 몇 마리가 다시 지윤이의 주위에서 에워싸고 마치 사냥감을 몰이하듯 뒤쫓기 시작했다.
"하아.. 어 엄마야... 흐 흐흑... 여기.. 맹수우리였나 봐... "
공포에 질린 지윤이는 지금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울먹였다.
하지만 이 한정된 공간에서 지윤이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여러 마리에게 몰이를 당한 지윤이는 곧 짐승들이 모여있는 중앙으로 쫓겨 나오게 되었다.

칵 칵.. 컹 컹컹...
짐승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붉은 만월의 밤.
그 보름달 아래에서 발정에 가득 찬 짐승들이 야성의 본능을 갈구하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놀라 그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자신을 뒤쫓던 짐승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아 아..."
여자아이는 이제 가까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 광경에 다시 넋이 나가 버렸다.
야성의 흥분과 울림..
심장 가득히 전해져오는 알 수 없는 고동소리, 그리고 전율.
분명히 이 짐승들도 동물원에서 인간들에게 길들여지던 동물들이었을 테지만, 오늘밤의 붉은 만월 아래에서의 그들은 그저 야성의 본능을 갈구하는 짐승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흥분된 야성의 울음소리도 곧 멈추어야 했다.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의 존재로 인하여, 짐승들의 집단 교미는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수컷들은 경계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고, 체구가 작은 암컷들과 새끼들은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나 있었다.
지윤이는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서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공포에 떨며 애처롭게 서있는 지윤이의 주위에는 여러 마리의 수컷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지윤이는 달빛 아래 드러난 짐승들을 두려운 듯 바라보았다.
무슨 짐승일까?
이것은?
지금 네 발로 서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컷들의 덩치는 마치 송아지 만한 개들과 같이 컸다.
생긴 것도 코와 주둥이가 길게 나와 마치 개처럼 생겼는데,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할 때는 길다란 송곳니가 무서웠다.
여기에 몸에는 털이 많고 꼬리가 길었기에, 지윤이는 이 짐승들이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짖는 소리는 맹수와는 다른 것 같았지만, 지금 지윤이로서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짐승의 수컷들이 땅에 앉아 상체를 들기 시작했다.
".....?"
짐승들이 무엇을 할지 두려움 속에 의아해했던 지윤이는 곧 다시 비명을 지르며 시선을 돌려야 했다.
"꺄 악..."
지윤이를 둘러싼 수컷들이 자신들의 크고 긴 자지들을 드러내 놓고서는 울음소리를 내며 리드미컬하게 흔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에서 짐승의 시뻘겋게 일어선 자지들이 위협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윤이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아.. 세상에... '
지윤이는 무서웠다.
'도대체.. 이 짐승들은 뭐지..?'
지금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분명히 사자나 표범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짐승들의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지윤이의 공포는 더욱 커져갔다.
과연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흑.. 사 살려주세요.. 흐흐흑.. 누구 없어요..? 제발..."
지윤이는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지만,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파묻혀 밖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사육사들도 잠이 든 깊은 밤이었던 것이다.

그때 저편의 높은 바위 위에서 지윤이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던 수컷 한 마리가 내려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짐승들이 그 수컷에게 길을 비켜주며 물러났다.
또한 이 놈은 다른 수컷들보다 덩치가 훨씬 컸고, 더욱 사납게 생겼다.
때문에 한 눈에 척 봐도 이 놈이 이 짐승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놈은 낮선 침입자 때문에 자신의 교미가 방해를 당하자 경계심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아 아.. 흐흐 흑..."
지윤이는 이 사나운 짐승에 더욱 겁을 먹고는 울먹이면서 오돌오돌 떨었다.
크르르...
우두머리 수컷은 우선 이 낮선 침입자에 대해 날카로운 송곳니로 적의를 드러내면서 잠시 경계를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지윤이는 이 우두머리 수컷이 다가오자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만 돌부리에 걸려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땅바닥에 주저앉게 된 지윤이가 당황하였다.
그래서 허둥대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바로 자신의 얼굴 앞으로 그 우두머리가 사나운 얼굴을 들이밀자 그만 오금이 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어.. 엄마야...'
땅바닥에 주저앉은 지윤이의 가냘픈 몸에 비해 우두머리 수컷의 덩치가 훨씬 컸다.
지윤이는 엉금엉금 기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지만, 뒤쪽에도 다른 수컷들이 시뻘건 자지를 흔들며 위협을 하고 있었다.
지윤이는 이제 여기서 죽었구나 싶었다.
갑자기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낮에 그렇게 헤어진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아빠.. 엄마.. 희진아.. 은수야...'
"흑.. 흐흑..."
지윤이가 그렇게 울먹이고 있을 때, 날카롭게 지윤이를 노려보던 우두머리 수컷이 갑자기 앞발을 들어 여자아이를 내려치려 했다.
"꺄악...!"
지윤이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우두머리 수컷은 내려치려던 앞발을 멈추고는 지윤이를 다시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앞발로 지윤이의 몸을 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악...!"
지윤이는 짐승의 앞발이 자신의 몸에 닿자 흠칫하며 더욱 웅크렸다.
그러나 곧 지윤이는 예상과는 다른 뜻밖의 감촉에 놀랐다.
"......?!"
'소 손가락..?'
지윤이는 무서운 와중에서도 살며시 실눈을 뜨고 코앞에 있는 이 짐승의 모습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리에 앉아 상체를 세우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는 이 짐승의 앞발.. 아니 팔과 발에는 분명히 긴 손가락과 긴 발가락이 달려있었다.
'그 그럼.. 혹시..? 원숭이.. 같은 것인가..?'
하지만 지윤이는 이렇게 사납고 무섭게 생긴 원숭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아직 원숭이라고 하면 침팬지 정도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다급했던 지윤이로서는 애써서 작은 희망이나마 찾으려고 했다.
만약에 맹수가 아니고 지능이 있는 짐승이라면 자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이 상황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어찌해야 좋을지, 지윤이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온몸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머리 속은 혼란스러웠다.
다만 이 짐승들을 자극하면 위험할까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마지막 품은 한 가닥의 작은 희망이 사실이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윤이의 그 작은 희망마저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여자아이의 온몸을 휩쓴 것은 말이다.
한동안 지윤이를 관찰하던 그 우두머리 수컷이 갑자기 손으로 지윤이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어디론지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악..."
지윤이는 순간 머리털이 모두 뽑혀져 나가는 듯한 아픔에다 이 짐승의 갑작스런 행동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우두머리가 낮선 침입자를 공격하자 지윤이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수컷들이 큰 소리들을 내며 흥분했다.
우두머리 수컷의 힘은 엄청나게 세었고, 지윤이는 제대로 저항도 못한 채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끌려가고 있었다.
"아악.. 아흐흑.. 아 아파.."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작은 심장이 지금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고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저 참을 수 없는 아픔과 다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여자아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윤이는 공포에 질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아흑..."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 이 짐승에게 끌려가면서도, 지윤이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
여자아이는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지윤이는 제발 이것이 꿈이기를 바랬다.
그저 악몽이었을 뿐이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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